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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커뮤니티

[습작] 소화기를 든 소녀

 

Photo by  Denny Müller  on  Unsplash

 


소화기를 든 소녀


10분이 흘렀는데도 소방관은 오지 않았다. 나는 정 선배, 라고 부르짖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자재창고에 그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헤어지기 직전, 그는 나에게 119에 전화하라고 자재창고 안에 있는 사람을 구하러 가겠다고 했으니까. 나는 뜨겁게 달구어진 소화기를 들고 자재창구 입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불길에 타들어가는 문, 검게 타버린 상자들이 검은 연기들 사이로 희미하게 보였다. 피부에 뜨거운 공기가 맞닿았다. 나는 뒤로 물러나면서 콜록거렸다. 그리고 복도에 쌓여 있는 다 쓴 소화기들을 바라보았다.

 

책상 가득 쌓여있는 서류들. 나는 업무 책상 앞에만 서면 손이 굳었다. “저건 애도 아니고, 또 못하는 거야? , 정 사원, 쟤 관리 똑바로 안 해?” 신 과장이 정 선배를 손가락질하며 타박했다. 정 선배가 나에게 가까이 왔다. 나는 타자를 치던 손을 멈추었다. 정 선배는 나에게 손을 올리고 갔다. 그녀는 나중에 나에게 위로의 문자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내가 못하는 일이 있으면 집에까지 찾아와서 가르쳐주곤 했다.

 

나는 다 사용한 소화기를 내려놓았다. 이제 7개 정도 쌓여 있는 것 같았다. 거친 숨소리를 듣고 이게 내 숨소리였나, 하며 조금 놀랐다. 검은 연기들 위로 분홍색 분말들이 날아들었다. 불길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나는 머리 아픈 것을 참고 허리를 숙였다. 사람의 윤곽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복도로 달려가서 하나 남은 소화기를 잡았다. 빠르게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 소화기를 좌우로 뿌렸다. 연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서둘러 사람의 얼굴에 손을 가까이 댔다. 옅은 숨길이 뜨거웠다. 그리고 사람의 고개를 조심스럽게 돌렸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 두꺼운 안경을 걸치고 있는 사람. 신 과장이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꺼진 줄 알았던 불꽃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소화기가 녹아내리는 것이 보였다. 여기에 가만히 내버려두면 아마, 죽겠지. 정 선배도. 나도. 아마 모두 죽을 것이다. 나는 다시 정 선배를 부르려고 했다. 목구멍이 뜨거워진 것을 느꼈다.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은 기침뿐이었다. 눈가가 따가웠다. 불길이 커지고 먼지들이 휘날리는 이곳에서 나는 아이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쌓여있는 소화기와 서류들. 자신이 해야하는 일들입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의미를 가지게 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게 한 습작이었습니다. 그 부분 외에도 이 작품은 현재 무능력한 제 자신의 모습을 그려놓은 것 같기도 합니다. 조금 씁쓸한 결말이지만 제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어서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